<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 (2018) 이나연
하루 종일 아래 집에서 올라오는 젓갈 냄새, 고춧가루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느 새 김장철인가보다. 나(필자)의 엄마는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겉절이를 무칠 뿐, 집에서 김장을 담근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김장의 경험은 6살 때 유치원에서의 김장 수업이 유일하다. 언제쯤 김장을 준비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김치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는 김치 마니아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도 이제 세상에 없게 되고, 김치를 너무 먹고 싶어서 혼자서 인터넷 레시피를 뒤져서 내가 먹을 만큼만 김치를 처음으로 담가봤다. 드디어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찬바람이 불고 아랫집 김장 담그는 냄새를 맡고 있자니, 2018년에 제작된 이나연 감독의 단편 <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가 생각난다. 곧 철거될 예정인 낡은 한옥형 주택의 작은 시멘트 마당에 지혜, 지훈, 지윤 삼 남매가 나란히 앉아서 김장을 담근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 집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떠나고 아마도 이들끼리 처음으로 담그는 김장인 듯하다. 이 의식을 위해 이들도 아주 오랜만에 마주했다. 온 기억의 감각을 총 동원해서 엄마의 김장 맛을 재현해 내려해 본다. 양념이 튈까 봐서 집에 남아 있던 엄마의 헌 옷들을 하나씩 걸치고 말이다. 엄마는 화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존재감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철거를 앞두고 있는 집, 김장이 수반하는 노동과 시간, 누군가 폐허의 땅에 심었던 꽃 등. 영화에서 감독의 시선이 머무는 곳들은, 첫째인 지혜가 남동생인 지훈에게 던진 “구경만 한 게 뭘 알겠어.”라는 말처럼 구체적인 경험의 역사가 없이는 너무 일상적인 풍경의 한 조각들이라 구체적인 행위와 시간들이 지워진 채 쉽게 비가시화되어 버릴 수 있는 곳, 것들이다.
그리고 삼 남매는 엄마로부터 도착한 택배 박스 안의 아프리카 의상들을 입고 마당에서 아프리카 춤을 춘다. 그리고 이 장면은 판타지처럼 펼쳐진다. 이들이 집 마당에서 신나게 아프리카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은 마치 굿판에서 느껴지는 어떤 시간들에 대한 치유와 화해의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이 하루 종일 직접 담근 김장 김치와 수육을 함께 먹고, 김치를 나눠 가지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며 영화도 끝난다.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방식은 비로소 다음 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큰 장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영화를 떠올리고 있자니 또 생각나는 어떤 풍경이 있다. 혼자 사시는 80대 이상의 분들을 인터뷰하며 촬영 다닌 적이 있다. 어느 80대 중반의 여성분의 집에 방문했을 때, 혼자 먹을 김장을 담그고 계셔서 김장을 담그시며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자녀분들에게 보내주시려고 김장을 하시는 거냐 여쭈니 자신이 먹을 거라고 하셨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김장을 담그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를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생각해 볼만하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 박소현 씀
<아프리카에도 배추가 자라나> 이나연 | 2018 | 극영화 | 29분
◾️ 시놉시스
한 해의 마지막, 삼남매는 함께 살았던 집에서 엄마 옷을 입고 김장을 담근다.
◾️ 볼 수 있는 곳
-퍼플레이
https://purplay.co.kr/service/detail.php?id=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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